나는 아주 알아주는 애주가이다.
내가 애주가이다보니
내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도 애주가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나만큼 자주 많이
술을 마시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학부 3학년 때인가
친하던 과 동기 이 형과 자주 술을 마셨다.
당시 오비블루라는 쌀맥주를 주로 마셨는데
원룸의 작은 냉장고 벽면에 마신 빈 캔을 세우면
하루 밤 만에 벽면이 가득 차곤 했었다.
그래도 그 때 들었던 음악, 했던 대화가
인간적인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 때도 자주 마시긴 했다.
주로 하루 일과가 밤 10시 11시에 끝나니까
그 때 부터 마시러 나갔던 것 같다.
박사 말년차 때는 아예 밤 12시 1시부터
마시러 나간 적도 종종 있다.
대학원 후배 이 군과 밤 추운 날씨에
아이 춥다 하며 술집에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 다닐 때는 특별히 회식이 많은 회사는 아니었어서
직장 동료들과 마신 일도 물론 한달에 한 두 번 있었지만
밴드 합주를 한 날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새벽까지 마시고 아침에 출근버스를 놓쳐서
광역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기도 했다.
(자율출퇴근제라 그래도 되었음)
원래 회사에서 점심을 잘 안먹었었는데
술마신 다음 날은 꼭 늦게라도 라면을 먹었던 기억이다.
어떤 분은 김 책임은 항상 취해있었다 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마시면 많이 마셨지만
그게 과하거나 잦지는 않았었는데
연구소에 들어가서 진정 헤비 드링킹이 시작된 것 같다.
연구소에는 주당들이 모여있었고
주당들은 동족인 나를 너무 쉽게 알아보았다.
상대적으로 근무의 유연성이 있어서인지
자주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마시면 새벽 2-3시에 3-4차는 기본이었다.
최 수석님과는 항상 마지막은 순대국집이었다.
이 때 소주의 진정한 효용을 배운 것 같다.
출장도 술마시러 가는 느낌이었다.
학교로 옮기고는 회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근데 문제는 이 때 주말부부를 했다는 점이다.
아내는 핑계라고 하긴 하지만,
어린 아이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지방 근무를 하는데
술에 취하지 않고 좋은 컨디션으로 자고
상쾌한 아침을 맞는 죄책감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술에 취해 잠들고 시간에 못이겨 일어나는게 필요했다.
지방에서 자는 날은 거의 전부 혼술을 했다.
(이해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랬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고
식당들도 밤까지 영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술 먹기가 어려워졌을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상 혼술러에겐 더 좋은 조건이 펼쳐진거다.
바로 배달의 활성화.
자연스럽게 배달이 매우 활성화가 되었고
어차피 혼술을 하던 나는 배달을 시키면 되니까
더 은밀하게 더 방해받지 않고 혼술이 가능했다.
밖에서 먹으면 아무래도 시간도 있고 불편하다.
집에서는 시간제한도 없고 가장 편하게
가장 원하는 것들을 OTT에서 보면서 마실 수 있다.
매일 혼자 소주 640 페트 하나는 비웠던 것 같다.
혼술의 습관은 서울의 학교로 이직하고도 계속되었다.
물론 지방에 있을 때 보다는 적어지긴 했을거다.
그래도 다음 날 일정이 크게 부담이 없다면
애들을 재운 후 냉장고에서 소주와 맥주를 꺼냈다.
연구소에서의 시간이 3년
지방의 학교에서가 5년
서울에서가 2년이다.
그러니까 헤비 드링커가 된지는 10년인 것 같고
혼술이라는 요소가 더해진 것은 7년
그리고 코로나 이후 정도가 심해진건 5년 정도.
(오히려 종종 먹던 시절보다 자주 먹던 시기가
술 먹고 사고치거나 다음날 문제된 적이 없었다)
중독이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그냥 술먹고 노는게 재미있어서 마신거고
술 먹고 뭐 먹는게 맛있어서 마신거다.
건강검진이 매년 안좋게 나오긴 했지만
당시 난 젊었고(지금보단)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을거란 자신이 있었다.
근데 작년의 건강검진에서는 조금 겁이 나는거다.
혹시 이대로 가다가 회복탄력성을 넘어버려서
고무줄 끊어지듯 탁 하고 건강을 잃는거 아닐까.
시력이 좀 안좋아졌는데 이거 안돌아올 것 같은거다.
나는 더이상 젊지 않았다. 아니 최소한 어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2025년 1월 1일부터 금주를 시작했다.
이번 방학 목표는 연구도 독서도 아닌
금주와 그로 인한 건강 회복이었다.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번 방학은 이 것만 잘 되어도 성공이었다.
처음 며칠은 밤에 좀 심심했다.
매일같이 나오던 도파민이 안나왔을테니까.
그래서 기타를 샀고 지판을 외웠다.
20년간 기타를 쳐도 안외워지던 지판이
일주일도 안되어서 대강 다 외워지더라.
그 외에는 딱히 술이 마시고 싶다거나
금단현상이 있지는 않았다.
역시 중독은 아니었나보다.
몇 번의 위기는 있었다.
술이 마시고 싶어서 위기인건 아니었고
어쩔 수 없이 나간 회식 자리에서
그 동안 술을 좋아하기로 소문난 내가
왜 오늘은 술을 안먹을건지를
크게 주목받지 않고 쓱 넘어가게끔 얘기하는게 어려웠다.
금주라고 하기엔 사실 평생 안먹을건 아니었고
건강이라고 하기엔 쓸데없이 개인정보를
남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다이어트라고 하기에도 좀 나대는 것 같고.
아무튼 몇 번의 위기를 적당히 잘 넘겨서
두 달 동안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이제는 술 안먹는게 더 자연스럽고 편하다.
물론 가끔 위스키 한잔 할까 싶긴 하지만.
그 결과 두 달만에
몸무게가 10kg이 줄었고
허리둘레가 10cm가 줄었고
혈압이 20 정도 줄었다.
(이제 기립성 저혈압 증상이..)
몸무게가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10년 전 입었던 옷들을 다시 입는다.
몇몇은 버렸지만 버리기 아까운 비싼 옷들은
혹시나 언젠가 다이어트가 될까 싶어 놔뒀었는데
요즘 그 옷들을 다시 입고 있다.
갑자기 비싼 새 옷이 많이 생긴 기분이다.
금주를 얼마나 더 할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3개월은 채워보려고 한다.
근데 그 동안 안마신게 아까워서
술에 손이 잘 안가기는 한다.
금주를 끝내도 헤비 드링커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종종 위스키나 와인 정도 조금씩 즐기고
필요한 날에 회피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려고 한다.
이승환이 일 년에 세 번 정도 마신다고 한다.
나도 그 정도 느낌으로.
'A Day in the Life > 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스키 (0) | 2025.04.05 |
---|---|
금주 및 다이어트 3개월 결산 (0) | 2025.04.02 |
블랙아웃 (0) | 2025.03.12 |
몸무게 (0) | 2025.03.02 |
온 열정을 다 하는 사람들 (0) | 2020.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