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ay in the Life 18

위스키

요즘 피키 블라인더스를 보고 있는데거의 매 씬 마다 위스키를 마셔서인지특히 토마스 쉘비가 위스키를 마실 때면위스키의 맛과 문화에 대한 동경이 생긴다.평생을 한 기업에서 헌신해오신 아버지는종종 위스키나 브랜디를 선물로 받아오셨는데어린 나에게는 마치 가족을 위해 인생을 바친사회생활의 전리품 같은 느낌이었다.그래서 나도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하나 둘 씩 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있었다.물론 나는 선물 받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스스로 출장 때 면세점 기웃거리다 사오거나동네 마트에서 큰 맘 먹고 하나씩 사는 수준이지만.2024년 2월 7일파리와 암스테르담을 다녀오면서도 사왔던 것 같다.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 뭐든 누적하고 기록하고 싶다.술이 전리품이라면 그 누적의 기록은 전시일거다.아이 책장 위에 저렇게 늘어..

금주 및 다이어트 3개월 결산

나는 나름대로Get Back 프로젝트라고 명명했었다.비틀즈의 감정의 골이 깊은 시기멤버들에게 다시 마음을 다잡자는 의미로맥카트니가 호소하는 곡인줄 알았는데,사실 최근 다큐를 보니 그건 아니었다.아무튼 2025년 1월 1일에 시작해서3월 31일까지 3개월 동안 진행한Get Back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다.금주:3개월 동안 술 한 방울도 안마셨고술 냄새도 맡지 않았다.별로 힘들진 않았다.안하기로 했으면 안하면 된다.다만 술자리에서 안마시겠다는걸적당히 인정시키고 넘어가는건 좀 어려웠다.식단:굶지는 않았고 다만 정제 탄수화물은 거의 안먹었다.점심은 주로 몇 가지 조합 중 하나였는데샐러디 우삼겹 누들볼, 요거트+블루베리+견과류최근 2주 정도는 바게트를 사서한 끼에 1/3개 정도, 7-8조각씩 먹었다.바게트가 의외..

W몰

요즘 12년 전에 샀던 옷들을하나씩 꺼내 입고 다니다보니그 때 옷을 사던 날들이 생각이 났다.당장 나는 대학원까지 대부분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다녔고무대의상(?)인 특이한 프린팅 티셔츠나니트 같은게 몇 개 있는 상태였는데대학원을 졸업하고 갔던 회사에서는비즈니스 캐주얼이라는 드레스 코드가 있었다.물론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진 애매하지만 대강면바지, 구두, 카라있는 셔츠나 폴로티니트, 블레이저 같은 것들이었다.그런 류의 옷들이 난 하나도 없다시피 했어서거의 다 새로 샀어야만 했다.(사실 좀 지나면 다 청바지에 운동화로 다니더라)당시 신혼이었고 아이도 없었던 우리는주말에 종종 가산에 있는 아울렛을 찾았다.가장 유명한건 마리오였었는데우리는 다소간의 반골기질이 있는지라거기보다는 후발주자이고 덜 붐비는길 건너의 W몰..

콜라병을 옮긴 기억

불현듯 이 기억이 떠올랐는데동생을 낳기 위해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낳기 전인지 후인지 까지는 잘 모르겠지만며칠 내외일테니 이제와서 큰 차이는 아니다.내 기억 속의 나는아버지를 도와 플라스틱 칸막이 트레이에 담긴작은 사이즈의 병 콜라 한 짝을계단으로 엄마 병실까지 들어서 날랐던 기억이 있다.나는 그게 정확한 기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아버지를 도왔고, 엄마에게 뭔갈 해줬다는게굉장히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근데 생각해보면 동생을 낳을 무렵이면만 3세 갓 지났을 때 인데그게 가능한건지 싶다.이게 정확한 기억인지 아니면 그냥 본걸 왜곡해서 기억하는건지 알 수가 없고따라서 아련하고 아름다운 기억들도어쩌면 나 스스로가 더 꾸며낸 기억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블랙아웃

2025년 3월 10일기념할만한 날이다.살면서 42년 동안 의식을 잃어본 적이 없다.중학교 때 한여름 땡볕 운동장 조회에서아이들이 핑핑 쓰러질 때도 난 멀쩡했다.도대체 어떻게하면 의식을 놓는거지상상이 잘 안가서 오히려 신기했었다.안그래도 요 몇 주 기립성 저혈압이 있었다.몸무게가 10주 동안 12kg이 빠지기도 했고한참 혈압 높을 때 처방받은 강한 약을의사의 별다른 지시가 없어서 계속 먹기도 해서수축기 혈압은 이미 100 이하였고이완기 혈압도 약 먹어도 90 근처이던 내가65 까지 떨어졌으니 그럴만도 했다.그리고 지난 3월 10일거의 10주가 되어갈 무렵 드디어 서서 기절을 하는 경험을 한다.기립성 저혈압 때문에 앉았다 일어서면어지럽고 눈 앞이 흐려지는 것은 이미 익숙했고좀 심하면 벽을 잡고 서 있으면 ..

몸무게

금주 글과 연계해서몸무게 글을 이어서 써보고자 한다.대략 지금 정도의 키가 되었을 때가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그 후로도 2-3센치 크긴 했겠지만대략 새츄레이션이 되었던 시기 같다.고 2 때 까지는 65-67kg 정도 유지했었다.이 때는 몸이 꽤 가볍고 빨랐다.100m도 14초 이내로 뛰곤 했으니까.(지금은 완주할 수나 있을까 100m)고 3 때 아무래도 운동량이 줄다보니72-73kg 정도 되었던 것 같다.70이 넘으니 금방 80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폭주가 시작되었다.해방감 때문이었을까 밤마다 부모님과 동생과 치킨 같은걸 시켜먹었다.튀긴건 아니었고 구운 매운 바베큐 치킨 같은거였다.그래도 금방 76kg이 되었고 이 때 보았던 76이라는 숫자는 충격이어서 기억이 난다.대학에 들어..

금주

나는 아주 알아주는 애주가이다.내가 애주가이다보니 내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도 애주가들이 많다.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나만큼 자주 많이술을 마시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학부 3학년 때인가 친하던 과 동기 이 형과 자주 술을 마셨다.당시 오비블루라는 쌀맥주를 주로 마셨는데원룸의 작은 냉장고 벽면에 마신 빈 캔을 세우면하루 밤 만에 벽면이 가득 차곤 했었다.그래도 그 때 들었던 음악, 했던 대화가인간적인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대학원 때도 자주 마시긴 했다.주로 하루 일과가 밤 10시 11시에 끝나니까그 때 부터 마시러 나갔던 것 같다.박사 말년차 때는 아예 밤 12시 1시부터 마시러 나간 적도 종종 있다.대학원 후배 이 군과 밤 추운 날씨에아이 춥다 하며 술집에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회사에 다닐..

대학 수시와 면접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몇몇 가까운 지인들의 경험에 의거하므로 100% 사실은 아닐 수 있습니다. 1. 입학사정관 수시에는 다양한 전형이 있지만 입학사정관이 되었을 때 했던 일은 학생부를 평가하는 일이었다. 밖에서는 다양한 말들이 있고 특히 학교마다 입학사정관의 취향이나 경향이 있다고 분석되곤 하는 것 같은데 내 경험 상 그런건 거의 불가능하다. 학교마다 전업 입학사정관이 있어서 그 분이 많은 지원자를 평가하긴 하겠지만 결국 각 학과에서 차출되는 교수들이 위촉입학사정관이 되어 지원자들을 평가하고 보통 이런 차출은 돌아가며 하기 때문에 위촉입학사정관은 거의 매년 바뀐다. 따라서 학교마다 학풍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학교마다 뚜렷한 입학사정관의 취향 차이는 있기가 어렵다. 내 경험상 입학사정관 한 명이 100..

대학 면접

시간을 훅 점프하긴 했지만 요즘 면접관으로 들어가다보니 갑자기 생각이 났다. 대학 면접은 딱 한 번을 봤었는데 그 대학에 붙어서 그대로 입학했다. 전날 대전에서 대학 근처로 올라왔다. 같은 학교를 지원한 윤 군과 같이 숙소를 잡았고 출장이 익숙했던 우리 아버지가 보호자로 동행했다. 방에서 시켜먹은 뼈해장국이 아직 기억난다. 대기실에는 당시는 블라인드가 아니었어서 아이들이 전부 교복을 입고 긴장한 채 앉아있었다. 그 중 참 똘똘해보였던 애는 강 교수가 되었고 뭔갈 혼자 계속 되뇌이고 있던 애는 이 대표가 되었다. 면접관으로는 세 분의 교수님이 계셨었는데 가운데가 박 교수님, 왼쪽은 작고하신 김 교수님, 오른쪽은 나중에 내 지도교수님이 되시는 조 교수님. 당시 면접 형식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들어가기 전..

지도교수님

나의 지도교수님은아메리칸 스타일 젠틀맨 그 자체셨다.처음 학부 때 지도교수님을 뵈었을 때가교수님 연세가 만으로 40이셨을 때니까지금의 나보다 약간 어리셨을거고처음 대학원 진학으로 지도교수님과직접적인 연을 맺을 때가 44세셨으니까사실 지금 나랑 별반 차이가 없다.근데 지도교수님은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당시에도 나에겐 아주 큰 사람이었고모든걸 다 알고 여유롭고 지혜로운 분이셨는데지금의 나도 내 학생들에게 그런 모습일까?한 번은 중기청 과제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인데누군지 알지도 모를 것 같은심사위원 하나가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것으로역정을 내며 그 자리의 우리를 꾸짖었었다.나는 완전 열받아서 참기가 어려웠는데지도교수님은 끝까지 미소를 띄며 여유로우셨고끝나고 내가 아까 그 사람 너무하지 않냐고 불평을 하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