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ay in the Life/Short Memories

유치원

SNOWBOOK 2024. 7. 3. 11:41

어릴 때 살던 곳인
대전시 동구 가양동 신도아파트는
아버지 회사 사택이었다.

따라서 동네의 많은 아이들이
아버지 회사 동료의 자녀들이었고
당연히 아이들이 또래면 대강
부모들도 비슷한 연배였기 때문에
몇몇 집들은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이런 말 쓰는지 모르겠지만
숟가락 젓가락 개수 다 알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옛날을 회상할 때 꼭 말하는
집에 엄마 없으면 아무 집이나 가 있어도 될 정도로.

그 중 나를 포함한 세 명이 유치원에 갈 순서가 되어
같은 유치원에 지원했었는데
추첨 결과 나만 되고 다른 두 아이는 떨어졌었다.
엄마가 그 날 매우 기뻐하던 기억이 난다.

동아유치원, 이었는데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기관에 처음 가보는 입장에서 큰 건물과
꽃밭이 있던 앞마당과
심지어 내 이름과 한 글자가 같았는데
그걸 근거로 여기가 최고이자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초등학교 때도 동아전과만 씀)

놀이 시간에는 앞 마당에서 꿀벌을 잡으며 놀았는데
유치원생이 꿀벌을 맨손으로 잡고 놀았다면 잘 안믿지만
그 때는 다들 그랬다.
꿀벌이 꽃에 앉으면 뒤로 뻗은 양 날개를
한꺼번에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잡으면
꿀벌은 버둥대기만 할 뿐 침을 쏘지는 못했다.
(그러다 날개 하나 놓치면 바로 침 맞는거)

그 유치원 커리큘럼의 하이라이트는(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졸업학기 즈음에 집에서 용돈을 받아서 오면
유치원 앞 슈퍼마켓에 가서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과자 하나를 사고
엄마에게 공중전화(!!)로 전화해서
그 사실을 보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 마지막 프로그램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좋은 장치였다고 생각했다.
과자 하나를 꼭 끌어안고 엄마에게 전화하는 사진이
집에 남아있던걸로 기억한다.

그 때는 그게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이벤트로 약간의 세상이 확장되었다.

얼마 전이었나 궁금해서 구글맵으로 찾아봤는데
유치원은 이미 문 닫은지 오래인 것 같고
건물만 방치되어 있는 것 같다.

아파트는 맵에 재건축 공사 중이라고 떠서
놀라서 생각나는 모든 맵을 다 동원해보니
아직 사진 업데이트가 안된 한 맵에서는
로드뷰 사진이 남아있어 얼른 저장했다.
아마 그 아파트를 기억하고 사진을 보관한
마지막 몇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없어짐의 속성은 대부분 비가역적이어서
없어진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점이 슬픈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것은 언젠간 없어지며
어떤 것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없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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